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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도쿄 스가모 산책, 조용한 거리에서 느낀 따뜻한 하루

by 너랑나랑 여행길 2025. 11. 26.

번화한 도쿄 속, 뜻밖의 느림을 만나다

처음 스가모역에 내렸을 때, 공기부터 달랐다. 신주쿠나 시부야처럼 사람에 치일 걱정이 없었다. 야마노테선이 지나는 역인데도 동네 분위기는 조용하고 담백하다. 역 앞에서 바로 이어지는 상점가가 오늘의 산책길이다. 흔히 ‘할머니들의 하라주쿠’라 불리는 곳, 이름부터 묘하게 따뜻하다.

 

800m 남짓 이어진 스가모 지조도리 상점가는 나름의 생기로 가득했다. 세월의 흔적이 배인 간판, 간간이 들려오는 인사말, 그리고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들. 화려하지 않은 이 거리엔 이상하게 ‘일상’이라는 단어가 잘 어울린다.

 

붉은 팬티와 소금 찹쌀떡, 그리고 오래된 정취

상점가 초입엔 ‘신쇼지(眞性寺)’가 자리 잡고 있다. 여행자의 안전을 빌어주는 청동 지장보살이 이곳을 지키고 있었다. 예전엔 에도 입구 중 하나였다고 하니, 스가모가 단순한 동네는 아니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붉은색으로 가득한 가게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마루지(Maruji)’다. 빨간 팬티가 주렁주렁 걸린 진풍경.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상징이라 한다. 외할머니 서랍 속에서 보던 그런 색감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그리고 ‘시오 다이후쿠’. 스가모를 대표하는 간식이다. 달콤하지 않고 은근한 짭조름함이 느껴진다. 그게 또 이상하게 중독된다. 옆집에서 파는 따뜻한 차 한 잔을 곁들이니, 도쿄 한복판에서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고간지의 ‘씻는 관음상’, 마음까지 닦이는 시간

상점가 중간쯤에 위치한 ‘고간지(高岩寺)’는 병을 낫게 해준다는 절로 유명하다. ‘도게누키 지조(가시를 뽑아주는 지장보살)’라는 별칭이 붙은 이유도 그 때문이다. 관음상에 물을 끼얹고 수건으로 닦는 사람들의 모습이 유난히 진지했다. 아픈 부위를 정성스레 닦으며 기도하는 그 손길에서, 종교보다 ‘삶의 간절함’이 느껴졌다.

 

내가 닦은 건 손이었다. 여행 다니며 쌓인 피로가 조금은 풀리는 기분이랄까. 절을 나서며 들른 ‘코나야’의 카레우동은 적당히 달고 부드러워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이런 게 진짜 도쿄의 식사일지도 모른다.

 

구 후루카와 정원에서 만난 도쿄의 두 얼굴

스가모에서 천천히 걸어 고마고메 방향으로 향했다. 조용한 주택가 사이로 이어지는 ‘소메이 긴자 상점가’를 지나면, 어느새 공원의 녹음이 보인다. 바로 ‘구 후루카와 정원(旧古河庭園)’.

 

이곳은 일본식 정원과 서양식 정원이 한 공간에 공존한다. 영국 건축가 ‘조시아 콘도르’가 설계한 서양 저택과 장미 정원은 유럽의 정원을 옮겨놓은 듯했다. 반면 아래로 내려가면 ‘오가와 지헤’가 만든 일본식 정원이 펼쳐진다. 연못의 형태가 마음(心) 자를 닮았다 해서 ‘신지이케’라 불린다. 가을빛으로 물든 단풍 사이에 앉아 있자, 도쿄가 이렇게 조용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레트로한 밤, 요요기 밀크홀에서 마무리

산책을 마친 후, 야마노테선을 타고 요요기로 향했다. 오래된 간판이 걸린 ‘요요기 밀크홀’. 이름부터 낯설고 정겹다. 내부는 쇼와 시대의 다방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했다. 흐릿한 조명 아래 흘러나오는 옛 노래, 나무 의자, 그리고 테이블 위 맥주 한 잔.

 

메뉴는 야키우동, 돼지고기 김치볶음, 그리고 추억의 과자 세트. 특별한 재료는 아니지만, 묘하게 마음을 덥힌다. 계산을 마치고 나올 때 막대사탕 하나를 건네받았다. 그 작은 친절이 오늘 하루의 여운처럼 남았다.

 

돌아보면, 결국 이런 하루였다

화려한 관광지 대신 조용한 상점가를 걷고, 오래된 절에서 마음을 닦고, 정원에서 계절을 느끼고, 레트로한 식당에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스가모는 ‘볼거리’보다 ‘머물러 있음’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다.

 

도쿄에서 이렇게 느리게 걷는 하루가 또 있을까. 이상하게 오래 남는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