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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

프랑스 마르세유부터 아일랜드 모허 절벽까지, 유럽 시간 여행

by 너랑나랑 여행길 2025. 3. 28.

시작하며

유럽을 여행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두 나라는 단연 프랑스와 아일랜드였다. 전통과 현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두 나라에서의 시간은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 하나의 깊이 있는 '이해'에 가까웠다.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의 항구에서 시작해 아일랜드 모허 절벽에서 끝나는 여정은, 그 자체로 시대를 오가는 문화와 감정의 흐름을 품고 있었다.

 

1. 마르세유에서 만난 활기와 기도

1) 항구 도시의 생생한 풍경

마르세유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와 접해 있는 대표적인 항구도시로,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공존하는 곳이다. 새벽 생선시장은 마치 다큐멘터리 한 장면처럼 생생하고, 노트르담 라가르드 성당에 오르면 항구 도시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새벽 바다에서 막 잡아온 생선을 파는 상인들의 모습은 이 도시의 생동감을 그대로 보여준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배들이 바다로 나가지 못한 날은 생선 가격이 치솟는다. 자연이 가격을 움직이는 도시, 그런 곳이 바로 마르세유였다.

2) 노트르담 라가르드 성당의 황금빛

성당 꼭대기에 세워진 황금빛 성모마리아 상은 오래전부터 바다에서 길을 잃은 선원들에게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 역할을 해왔다. 벽면 가득히 적힌 글자들은 무사 귀환을 기도하고, 감사의 뜻으로 남긴 봉헌들이다. 긴 세월, 사람들이 간직해 온 간절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곳이었다.

 

2.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배경, 샤토디프 섬

① 섬 전체가 하나의 감옥

마르세유에서 약 3.5km 떨어진 바다 한가운데 작은 섬이 있다. 프랑스의 고전 소설 <몬테크리스토 백작>의 배경이 된 그 감옥, 샤토디프다. 1531년에 세워진 이 요새는 처음엔 마르세유를 방어하기 위한 군사기지였지만, 이후 정치범을 가두는 감옥으로 쓰였다. 섬 중심에 위치한 요새는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대한 성처럼 위압감을 준다.

② 소설과 현실이 만나는 공간

알렉상드르 뒤마가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쓴 이후, 이 감옥은 문학적 상징으로도 유명해졌다. 실제로 소설 속의 주인공이 수감된 독방과 비밀 통로도 만들어져 있어, 현실과 상상이 겹쳐지는 독특한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

③ 감옥에도 계급이 있었다

교도소 안에서도 돈을 낸 부유한 수감자들은 햇살이 드는 방에 머물 수 있었다. 반면 대부분의 죄수들은 좁고 캄캄한 방에서 생활했다는 이야기는 시대를 불문하고 반복되는 계층 구조를 상기시킨다.

 

3. 거리의 예술, 르파니에 지구와 프로방스 인형

1) 거리 자체가 캔버스

마르세유의 또 다른 매력은 르 파니에 지구였다. 예전엔 가난한 이민자들과 예술가들이 살던 곳이었지만, 지금은 거리 예술이 가득한 벽화 마을로 변모했다. 주민들은 자기 집의 대문을 예술가에게 내어주며, 동네 전체가 하나의 작품처럼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변했다. 직접 벽화를 그리고 있는 작가들을 만나볼 수도 있었다.

2) 프로방스 특산 인형

한 상점에서는 프로방스 지역 특산품인 '상통 인형'을 만났다. 질 좋은 황토로 만들어져 채색된 이 인형은 처음에는 크리스마스 장식용이었지만, 점차 지역 주민의 삶을 표현하는 형태로 발전했다고 한다. 200년 넘게 이어온 이 전통은 매년 새로운 캐릭터를 개발해야 한다는 점에서 살아 있는 문화유산으로 느껴졌다.

 

4. 에메랄드빛 자연을 품은 베르동 협곡과 생트크루아 호수

① 중세 마을 생트 마리

협곡과 호수 사이에 자리한 생트 마리 마을은 석회암 절벽 사이에 조성된 아기자기한 풍경이 인상적이었다. 절벽 위엔 패러글라이딩을 즐기는 사람들까지 있었고, 중세시대부터 이어져온 별 장식이 집 사이를 잇고 있어 색다른 분위기를 자아냈다.

② 생트크루아 호수의 매력

이 호수는 1970년대에 댐 건설로 생긴 인공 호수이지만, 자연 못지않은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수면 위로 보트를 띄우고 협곡 안쪽까지 들어가면 에메랄드빛 물색과 깎아지른 절벽의 조화에 감탄하게 된다. 특히 석회암 성분이 녹아든 물이 만들어내는 투명하고 신비한 색감은 그 자체로 예술이었다.

③ 자연의 경고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 뒤에는 이상 기후로 인한 문제도 있었다. 이례적인 가뭄으로 인해 협곡 수심이 낮아지면서 보트가 암석과 부딪히는 일이 잦아졌다고 한다. 인간의 편의를 위한 개발이 자연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되돌아보게 되는 순간이었다.

 

5. 영화의 시작점, 라 시오타의 에덴 극장

① 세계 최초 상업영화관

라 시오타는 조선업이 발달한 항구 도시이지만, 사실 영화의 발상지로 더 잘 알려진 곳이다. 그 중심엔 1899년에 세워진 '에덴 극장'이 있었다. 에덴 극장은 세계 최초의 상업 상영이 이뤄진 장소다. 루미에르 형제가 만든 영화가 처음 상영된 이곳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라 영화사 자체를 품고 있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② 복원과 재개관의 역사

오랜 세월 동안 여러 번 폐쇄 위기를 겪었지만, 지역 주민들과 영화계 인사들의 노력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이곳은 이제 단순한 상영관을 넘어, 영화의 시작을 보여주는 박물관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내부엔 영화 제작 기계부터 당시 필름 사본까지 다양한 전시물이 있었다.

③ 라 시오타가 영화사에서 갖는 의미

처음엔 오페라와 연극 무대로 사용되던 공간이 영상 매체의 탄생과 함께 바뀌어갔고, 에덴 극장은 그 변화를 모두 지켜본 산증인이었다. 지금도 지역 주민들은 이 건물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손을 보며 가치를 이어가고 있었다.

 

6. 초록의 나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슬레인까지

① 성 패트릭 대성당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 패트릭에게 바쳐진 이 대성당은 12세기부터 이어져온 신앙의 중심이다. 내부엔 <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도 묻혀 있다. 한때 폐허로 남겨졌던 이곳을 되살린 인물이 바로 기네스 양조장의 창립자 벤자민 기네스였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② 기네스 맥주 체험관

더블린 한복판엔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흑맥주 브랜드, 기네스의 체험장이 있다. 효모를 금고에 보관할 정도로 품질 관리에 신경 썼던 흔적들, 초기 임대 계약 문서까지 전시돼 있어 아일랜드 산업사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었다. 맨 꼭대기층에선 더블린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고, 방문객들은 흑맥주 한 잔과 함께 그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7. 슬픈 역사의 기억, 킬마이넘 감옥

① 독립운동의 중심이 된 감옥

더블린 외곽에 있는 킬마이넘 감옥은 아일랜드 독립의 상징적인 장소로 남아 있다. 18세기 말에 지어진 이 감옥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수감되던 열악한 환경으로 악명이 높았다. 1916년 부활절 봉기를 주도한 독립투사들이 이곳에 수감되었고, 많은 이들이 이곳에서 사형당했다. 특히 사형 직전 급히 결혼식을 올린 조셉 플렁켓과 그레이스 기포드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② 예술로 남은 저항의 흔적

그레이스 기포드는 감옥 안에서 다양한 그림을 남기며 저항의 의지를 이어갔다. 그 중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그린 작품은 아직도 보존되어 있다. 감옥 마당에는 독립투사들을 기리는 십자가와 동판이 설치되어 있어 이들의 희생을 기리고 있다.

③ 800년의 지배를 끝낸 역사

아일랜드는 1949년에 공화국을 선포하며 영국의 오랜 지배로부터 벗어났다. 이 감옥은 그 과정 속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이곳을 찾아 역사의 무게를 느끼고 있다.

 

8. 음악과 위스키, 슬레인성과 여름 축제

① 성주가 직접 안내하는 고택

슬레인은 아일랜드 중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지만, 슬레인 성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가 이어지는 곳이다. 특히 여름 축제와 위스키 양조장으로 유명하다. 240년 넘은 이 성은 영국 왕 조지 4세가 머물던 방까지 보존돼 있으며, 실제로 성주가 거주하며 내부 투어를 운영하고 있다. 유서 깊은 그림과 고풍스러운 인테리어는 귀족의 삶을 엿볼 수 있는 귀한 기회였다.

② 유투(U2)와의 인연

세계적인 밴드 유투가 이 성에서 앨범 작업을 시작했으며, 이후 이곳은 세계적인 공연장으로도 이름을 알렸다. 여름마다 열리는 대규모 음악 축제는 아일랜드 음악 팬들의 성지처럼 여겨진다.

③ 위스키 양조장으로 변신

성 인근에서는 보리와 강물을 활용해 위스키를 만들고 있다. 성 운영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는 동시에, 지역 전통을 이어가는 방법 중 하나였다. 음악과 술이 조화를 이루는 이 공간은 아일랜드 특유의 여유를 잘 보여주는 장소였다.

 

9. 5,000년 역사의 고분, 브루나보인

① 노스 유적의 신비

슬레인 인근에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고분군이 있다. '브루나보인'이라 불리는 이 유적은 이집트 피라미드보다도 오래되었으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있다. 거대한 봉분과 그 위를 감싸는 수많은 암각화는 고대인의 우주관을 상징한다. 이곳은 한때 통로형 무덤으로 사용되다가 이후엔 종교 의식을 거행하는 신성한 장소로 기능했다.

② 뉴그레인즈의 정교함

동지날 아침, 해가 떠오르며 내부 통로를 따라 빛이 정확히 석실 바닥까지 들어온다. 이 놀라운 정렬은 고대인들의 천문학 지식과 건축 기술이 얼마나 정밀했는지를 보여준다. 5,000년 전 사람들의 지혜와 세계관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공간이었다.

 

10. 천 년의 시간을 견뎌낸 선술집, 세즈 바

① 나무와 흙으로 지은 벽

슬론 지역에 위치한 세즈 바(Shee's Bar)는 단순한 펍이 아니라, 아일랜드 역사와 일상이 녹아 있는 공간이다.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고리버들 나무와 진흙으로 만든 벽인데, 이 독특한 구조는 기네스북에도 등재됐다. 외관은 평범해 보여도 내부에 들어가면 수백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② 비밀 공간의 존재

관리자가 안내한 뒷공간엔 예전 경찰이나 지성인들이 몰래 모이던 숨은 공간이 있다. 마치 영화 한 장면처럼, 이곳에서 벌어진 이야기들을 상상하게 된다.

③ 지역민과 관광객의 사랑

오랜 시간 지역 주민들에게 사랑받던 이곳은, 이제는 전 세계 관광객들이 일부러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아일랜드 고유의 분위기와 따뜻한 사람들의 정이 어우러진 이곳은, 여행의 마무리를 하기엔 더없이 적절한 장소였다.

 

마치며

프랑스와 아일랜드를 여행하며 느낀 것은 단순한 풍경의 아름다움만이 아니었다. 두 나라가 오랜 시간 쌓아온 역사와 문화를 현재까지 어떻게 품고 살아가는지를 가까이에서 확인할 수 있는 기회였다. 지중해 바람이 부는 마르세유 항구에서부터, 아일랜드 초록 들판을 품은 슬레인성까지. 시간을 건너 이어지는 그들의 삶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분명한 울림을 전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