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이상하게도 마음을 멈추게 만든다. 눈이 소복이 쌓인 길 위에서 발자국을 남기다 보면, 바쁜 일상보다 지금 눈앞의 풍경이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매년 1~2월이 되면 나는 일부러 국내 여기저기를 돌아다닌다. 그 계절에만 볼 수 있는 하얀 풍경, 그리고 고요한 공기를 만나기 위해서다.
이번에는 그동안 다녀온 곳 중 특히 겨울에 다시 가보고 싶은 여행지 20곳을 꼽았다. 어떤 곳은 바람이 매섭지만 풍경이 압도적이었고, 어떤 곳은 조용히 걷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졌다.
겨울 산을 가까이에서 느끼고 싶다면
눈이 내린 날 강원도 고성의 소노캄 델피노 옥상 전망대에 서면 울산바위가 정면으로 펼쳐진다. 흰 산자락이 끝없이 이어지는데, 마치 알프스라도 온 듯한 착각이 든다. 주차장에서 바로 이어지는 길이라 접근성도 좋았다.
조금 더 드라이브를 즐기고 싶다면 평창 대관령휴게소에 들러보는 것도 좋다. 영동고속도로를 달리다 잠시 멈춰서면 눈 덮인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양떼목장이나 선자령으로 향하는 길 초입이라 트레킹과 함께 묶어 즐기기도 좋았다.
겨울의 트레킹이 부담스럽지 않은 곳으로는 철원의 한탄강 물윗길을 추천한다. 얼어붙은 강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들고, 화산 분출로 생긴 절벽이 병풍처럼 이어진다. 실제 걸으면 바람이 차갑지만, 그만큼 공기가 맑고 깨끗했다.
바람이 세차도 다시 찾게 되는 강원도의 겨울 풍경
강릉의 안반데기는 해발 1,000m가 넘는 고랭지 밭 위로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돌고 있다. 눈이 쌓인 날 올라가면 바람이 얼굴을 때리지만, 그 순간의 풍경은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일출을 보려는 사람들도 많고, 주차장까지 도로가 잘 닦여 있어 접근도 어렵지 않다.
서울에서도 짧고 강렬한 겨울 풍경을 보고 싶다면 북악팔각정을 빼놓을 수 없다. 도심과 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으로, 눈 내린 다음 날 차 한 대로 가볍게 다녀오기 좋았다. 근처 카페에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한참을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남는다.
원주의 판대 아이스파크는 인공 빙벽이 세워진 독특한 장소다. 처음 갔을 때는 단순한 얼음벽이라 생각했는데, 높이가 100m 가까이 되어 마치 얼음 성벽처럼 웅장했다. 옆의 카페에서 바라보는 뷰도 좋아 겨울 드라이브 코스로 자주 떠오른다.
사찰이 주는 겨울의 고요함
고창의 선운사는 눈이 내리면 사찰 앞을 흐르는 천 위로 흰 눈이 내려앉아 그야말로 평화롭다. 평지길이라 부담 없이 걸을 수 있고, 잠시 머물며 마음을 내려놓기 좋은 곳이었다.
강릉의 낙산사는 동해 바다를 내려다보는 절이라, 바람이 거세도 그 풍경이 모든 걸 잊게 만든다. 정문에서 이어지는 숲길을 따라 걸으며 바다 소리를 들었던 그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장성의 백양사는 가을 단풍으로 유명하지만, 겨울에는 또 다른 분위기다. 고요한 공기와 오래된 절집의 색이 묘하게 어울려 ‘고찰’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 느끼게 한다.
평창의 월정사 전나무 숲길은 눈 내린 날이면 동화 속 같다. 도로 바로 옆에 있지만 숲 안으로 몇 걸음만 들어가면 세상이 조용해진다. 발밑에 쌓인 눈이 사각거릴 때마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사람이 적어 더 좋은 숨은 명소들
춘천의 등선폭포는 생각보다 웅장하다. 높은 절벽이 이어져 사진을 찍기에도 좋고, 폭포까지 이어지는 길이 짧아 부담 없이 다녀올 수 있다. 입장료가 있지만 겨울철엔 인적이 드물어 조용히 걷기 좋았다.
정선의 구미정은 오래된 정자 하나가 강을 따라 자리하고 있다. 눈 쌓인 바위와 나무들이 조화를 이루어 마치 옛 그림 속 풍경 같았다. 겨울의 고요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마음에 남을 곳이다.
단양의 도담삼봉은 사계절 내내 유명하지만, 얼어붙은 남한강 위로 눈이 덮인 겨울 풍경은 또 다른 매력이 있다.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수묵화를 보는 듯하고, 근처 도로에서 보는 각도마다 느낌이 달라 여러 번 셔터를 눌렀다.
속초의 대포항 전망대는 차를 세우고 5분만 걸으면 닿는다. 겨울 바다와 설악산 능선을 한눈에 담을 수 있어 ‘짧고 확실한 만족감’을 준다.
고양의 서오릉은 눈이 쌓이면 고요한 산책 코스로 변한다. 언덕 위로 왕릉이 줄지어 있고, 소나무와 잔디밭 위에 내려앉은 눈이 부드럽게 빛난다. 주변이 조용해 한참을 걷게 된다.
겨울 제주에서 만난 따뜻한 풍경
이승이오름에 올랐을 때 삼나무 숲 사이로 햇살이 스며드는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오름 정상까지 오르는 길이 완만해서 가볍게 산책하듯 다녀오기 좋았다.
사려니숲길은 겨울에 더 매력적이다. 눈이 나뭇가지에 살짝 얹히면 붉은 흙길과 대비되어 풍경이 정말 아름답다. 주차는 붉은오름 입구 쪽이 가장 편했는데, 천천히 걷다 보면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조천의 제동목장은 요즘 사진 찍기 좋은 곳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직접 가보니 왜 그렇게들 찾는지 알 것 같았다. 설원 위에 서 있는 나무들과 목장 펜스가 한 장의 사진처럼 완성된다. 다만 차량 진입이 제한되어 근처 주차장에 차를 두고 걸어야 한다.
마지막으로는 역시 한라산 윗세오름이다. 예약이 필요 없는 코스로, 눈이 많이 내린 날이면 그야말로 하얀 세상이 펼쳐진다. 오르는 길이 힘들지만, 그 풍경을 보고 나면 모든 피로가 사라진다. 그날의 하늘색과 눈빛은 아직도 또렷하다.
이 스무 곳을 모두 한 해 안에 돌아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하나씩 다녀오다 보면 어느새 겨울이 기다려지는 사람이 된다.
찬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에도 마음이 따뜻했던 그 여행들처럼, 올해 겨울도 누군가에게 그런 순간으로 남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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